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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째 교회에 나가 기도했는데 병이 낫지 않는 건 믿음이 부족해서일까?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걸까? 예수를 믿으면 돈도 많이 벌고 건강해지는 ‘상’을 받는 것일까?
총신대 대학원장을 지낸 복음주의 신학자 김세윤(64) 풀러신학대학원 교수는 “죄와 고난, 신앙과 복(福)을 무조건 인과관계로, 일대일로 관련짓는 것은 신학적·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태도”라고 지적한다.
그는 한 발 더 나아가 최근
미국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공저로 펴낸 책 ‘탐욕의 복음을 버려라’(새물결플러스)를 통해 예수를 믿으면 건강 얻고 출세하고 부자된다는 신학을 ‘번영신학’으로 규정하고 “맘몬(재물)에 대한 우상숭배에 다름 아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강연차 한국에 들른 김 교수를 인터뷰했다.
―건강과 부를 얻고 싶어하는 마음이 무엇이 문제인가.
“그 두 가지가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기본적 가치인 것 맞다. 하지만 의로운 길을 통해 얻어야 한다. 탐욕으로 과도한 부(富)를 추구하려면 결국 남의 것을 빼앗게 된다. 예수는 ‘누구도 하나님과 재물을 동일하게 섬길 수 없다’(마태 6:24)고 했다. 월스트리트의 맘몬 우상숭배가 전세계를 불황으로 몰아넣고 수억명의 삶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을 보라.”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하나님 나라를 시간적으로 미래로 연기하거나, 공간적으로 하늘 위로 밀어올려선 안된다. 지금 여기에 살면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자세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 대한 요구는 단순하다. ‘혼신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18~19장에서 부자 청년은 ‘평생 모든 계명을 다 지켜왔다’며 예수에게 칭찬받길 원하지만 예수는 ‘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한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 속으로 들어간다는 건 무슨 뜻인가.
“하나님 나라는 가치 판단과 윤리적 선택의 순간마다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공해방지시설을 눈가림으로 하고, 철근 빼돌려 부실공사하고, 저질 식재료를 써서 음식 팔면 돈은 많이 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지구와 내 이웃이 병든다. 사회의 다수가 물신주의적 삶의 방식을 취할 때 그런 방식을 포기하면 손해보고 고난당한다. 성경에서도 의인은 더 큰 고난을 받으며, 그 고난의 절정이 예수의 고난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네 십자가를 지고 너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한 것도 그런 의미다.”
―보통 사람, 모든 사람이 가진 걸 다 내놓을 수는 없지 않나.
“중요한 것은 전부냐 반이냐가 아니라 ‘근본 정신’이다. 돈을 더 쌓아놓으려고 이웃을 착취할 것이냐, 아니면 정당하게 벌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위해서 쓰느냐의 문제다. 가난한 사람을 거둬 먹이고 함께 살았던 초대교회의 정신에 주목해야 한다.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마태 3:13) 해야 한다. ‘하나님 이름이 너희로 인해 모독을 받는다’(로마 2:24)는 말을 들어서야 되겠는가.”
―그래도 보통 사람들에겐 여전히 어렵다.
“맞다. 어렵다. 그런 어려운 걸 잘하도록 서로 북돋우라고 교회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핵심을 저버리고, 돈 많이 벌어 헌금 많이 하라고 하는 건 올바른 신앙의 방식이 아니다. 그러면 교회가 그리스도의 향기와 매력을 잃게 되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도 없다.”
―한국교회가 자원봉사나 구제사역을 참 많이 하는데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다고도 한다.
“고개를 바짝 들고 ‘내가 의롭다’ 하는 바리새인같은 태도를 가져선 안된다. 하나님이 다 알아주실 거라 믿고 일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세상이 ‘뉴스에 나오는 일부 교회의 추태가 다가 아니었구나’, ‘한국교회가 정말 하나님 나라와 이웃을 위해 헌신해왔구나’ 하고 알아줄 것이다. 알아주지 않으면 또 어떤가. 예수가 자기를 내세우려고 말로 싸우던가?”
―‘그러는 당신은?’, ‘너나 잘하세요’ 같은 시니컬한 태도로 ‘쿨’ 한척 하는 사람도, 그런 태도에 상처받는 사람도 많다.
“그런 건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니다. 나도 이런 말 하면서 스스로를 향해 설교하는 것이다. 가치 판단의 순간 10번 중 한 번이라도, 나의 욕심보다는 예수의 권면에 따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기준으로 해보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남자의 얼굴에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 환경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모진 인생의 흔적을 느끼게 하는 얼굴보다는 평안한 얼굴을 더 선호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모든 것들에 대해 용납하고 수용하며, 경쟁보다는 이해와 사랑으로 다가가고, 조급함보다는 넉넉함 가운데 살고 싶어한다. 젊은 날 성장과 성공을 위해 인색한 삶을 살아왔다면 이제는 풍성한 삶의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풍성한 삶을 위해서는 선한 일을 행할 준비가 필요하다(딛 3:1).불평할 수 있는 삶에서 내가 선한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순간 내가 사는 세상에 소망이 시작될수 있다. 현실을 비방하거나 다투지 말고 온유함으로 생활해야 한다(딛 3:2) 어리석은 자, 순종하지 않는 자, 속은 자,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 악독과 투기를 일삼는 자, 가증스러운자,피차 미워하는자(딛 3:3)로 살았던 것을 버리고 떠나는 순간 우리는 선한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준비가 된 것이다.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 마음의 변화를 받아 옛 생활을 떠나는 중생의 씻음과 나날이 새로워지는 성화야 말로 성령께서 새롭게 하시는 삶이다(딛3:5). 우리는 은혜를 힘입어 이전의 죄악과 상관없는 의로운 자의 삶을 살고 있다.그리고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었다. 이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선한 일을 할 수 없었던 인생이 가장 풍성한 삶을 살아갈 준비를 하게 해 준다. 그래서 구원받은 자는 이전의 헛된 욕망과 죄악된 구습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 인생의 풍성함은 많은 물질과 명예에 있지 않다. 풍성한 삶은 선한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그래서 풍성한 삶의 결과는 아름답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삶으로 나타난다. (딛 3:8)

남자들이여, 자신의 현실과 욕망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가는가? 아니면 나를 걍팍하게 만들고 욕심의 노예로 만들수 있는 현실을 떠나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풍성한 인생은 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다.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 알지 못하는 남자들에게 복음을 나눠 줌으로써 풍성한 삶을 살자.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모르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풍성한 삶을 살아가자 —날마다 솟는 샘물—

남자들에게는 자신의 모습을 겸허하게 돌아보는 일이 쉽지 않다. 자신을 살 필 수 있다면(갈6:1),남자들의 인생이 위기 앞에서 그렇게 맥없이 무너지진 않았을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형제들에게 참된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참된 삶을 살기 위해 내 자신을 먼저 살펴보고(갈6:1),주변과 이웃을 살펴서 시험받지 않을 것을 당부한다. 참된 삶을 위한 첫번째 제안은 짐을 서로 지라는 것이다(갈 6:2). 누군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면 서로 나누어 지는 일에도 힘써야 한다. 서로 짐을 나누어 져야 하는 이유는 생활 속에서 자신의 행동들을 살펴봤을때(갈 6:4), 자신 역시 연약함이 있는 부족한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갈 6:3). 나의 부족을 안다면 형제의 부족함을 비판하고 정죄할 수 없다.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약함 가운데서 강하고 담대한 인생의 자리로, 허물과 죄악의 자리에서 소망과 감사의 자리로 옮겨가도록 함께 해야 한다.참된 삶을 위한 두번째 제안은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갈6:7)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중심적일 때가 많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그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의 일터를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고는, 축복을 받으면 예배와 섬김의 장이 아닌골프장과 같이 나를 위한 장소로 달려가길 더 선호한다. 물론 재물과 부요를 주신 은혜를 누리는 것도 성도의 특권이다. 그러나 특권을 누리기 이전에 은혜와 축복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의 섬김과 나눔이 있어야 한다. 참된 삶을 위한 바울의 세번째 제안은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갈6:9). 선을 행하면서 낙심하고 포기하지 않으면 거둘수 있으므로,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권면한다. 믿음의 가정들을 세우는 선한 일들은 포기할수 없는 일들이다. 남자들이여, 내게 축복을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와 자신을 살피는 기도 가운데 어떤 기도를 더 많이 하는가? 내가 잘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삶을 살면서 다른 누군가의 것을 빼앗고 있진 않은가? 내 자신을 살피고 주변의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힘겨운 인생의 짐을 들어주자. 하나님과 약속했던 것들을 기억하며 스스로 속이지 말고 선한 일을 계속하자.참된 인생은 방향설정이 잘된 삶이다. 참된 인생을 살고 있는지 오늘 나를 살펴보자 —날마다 솟는 샘물—

이전에 술과 담배는 기본이고 돈을 버는 것이 인생의 최고 목적이었으며,즐길 수 있는 한 최대한 즐기며 살고자 안간힘을 썼다. 이처럼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고 싶어 몸부림쳤지만, 정작 자신이 할 수 없는 것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인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갔고, 그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 결과 지금은 달라진 삶을 살아간다. 이전에는 돈의 노예가 되어 돈을 벌기 위해 살았지만, 지금은 그리스도 안에서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종의 삶을 살아간다. 남자들의 욕망과 욕심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욕망과 욕심은 남자들로 하여금 죄에 종노릇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복음은 남자들의 삶을 자유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 주신 사랑을 통해 남자들은 자신을 위해 살았던 인생에서 남을 위해 사는 인생으로 방향전환을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갈 5:1)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사건이 과거의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하는 표현이다. 이 자유에 대해 누구도 문제 삼을수 없도록 완전한 자유가 주어진 것을 의미한다. 자유로운 삶을 사는 남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갈 5:1)고 명령한다. 욕망으로 얼룩진 종의 멍에를 메고 살았던 기억을 붙든 채 스스로 종의 삶을 살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는 믿음과 말씀 위에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복음은 항상 우리로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살아가도록 만들어 준다. 이제는 나 홀로 두려움 가운데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든든한 인생이다.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약속(마 11:28~30)을 믿고, 그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자. 남자들이여, 예수님과 함께 산다고 하면서도 욕심과 욕망의 노예처럼 살아가는가? 지금 내가 누리는 자유와 즐거움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 살아갈때 주어지는 자유로움을 생활속에서 경험하고 있는가?붙들고 사는 인생은 곤고하지만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맡기고 사는 인생은 실로 자유롭다. 주님과 함께할때 내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길수 있기에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경험할수 있다.—날마다 솟는 샘물—

‘나같은 죄인’이라는 찬송을 작사한 존 뉴톤은 어머니가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신앙생활을 받아 경건하게 살았으나, 어머니가 별세한 후로 생활이 엉망이 되었다. 뉴톤은 아버지를 따라 뱃사람이 되면서부터 세상의 못된 짓만 배우고 악행을 일삼았다. 아버지는 아들의 방탕한 생활에 크게 실망하여 결국 그를 내쫓고 만다. 그후 뉴톤은 노예선의 선장이 되었고 더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여 새사람이 되었고, 그 후 목사가 되어 일생을 경건하게 살았다. 그는 82세가 되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교회를 섬겼다. 뉴톤 목사가 천국에 가기 직전에 했던 다음 말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천국에 가면 세가지 놀라운 일을 발견하게 될것입니다. 하나는 내가 생각지 않았던 사람을 만나는 것이고, 다음은 분명히 천국에 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없는 것이고,셋째는 나같은 죄인이 천국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도 뉴톤의 인생처럼 극적인 전환점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인물이다. 직선처럼 앞으로만 직진할것 같았던 인생들이 예수를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고, 그 결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모습을 볼수 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새롭게 사는 인생의 전환점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해준다. 새롭게 사는 인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인생이다. 새롭게 산다는 것은 나를 새롭게 인식하고, 나의 인생을 이전의 목적과는 다른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진 것이다. 사도 바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이 말씀처럼, 우리는 내 인생의 전환점을 경험케 했던 회심의 말씀이 있는지 찾아보자. 남자들이여,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느끼는가? 옛날과 분명하게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면, 나를 변화시킨 말씀이나 계기는 무엇인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한 노력은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멈춰서는 안 된다. 매일매일이 내 인생에 새로운 날인 것처럼, 나의 믿음도 매일매일 새롭게 확인하고 점검해야한다. 그럴때 새로운 삶을 살수 있다. —이의수 목사—

최근에 스페인 마드리드의 시내버스에 이런 광고문이 붙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당신의 삶을 즐기라”(God probably does not exist so enjoy your life!) 스페인의 무신론자 단체가 낸 광고입니다. 그 광고문에 중요한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마’(probably)입니다. 무신론자들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확실히 말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아마’라는 불확실한 단어에 영원한 운명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참 어리석은 판단입니다. 또 하나는 ‘삶을 즐긴다’(enjoy life)입니다. ‘enjoy’는 요즘 사람들이 가장 자주 사용하는 말입니다. 즐긴다는 것은 원하는 것을 최고로 누린다는 뜻입니다. 즐긴다는 것 자체가 나쁜것은 아닙니다. 즐기는 것은 좋은데 어떻게 즐기는지가 문제입니다. 즐기는 자신과 이웃에게 도움이 되는지, 아니면 해를 끼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 광고 문구의 ‘아마’는 무신론적 사고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과 삶을 즐기는 것은 결코 함께할 수 없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쾌락에 방해가 되니 하나님이 안 계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마드리드에 있는 푸엘라브라다 복음교회(The Fuelabrada Evangelical Church)가 무신론자의 광고에 맞서 이런 광고문을 붙였습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즐기세요”(God does exist so enjoy life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삶을 가장 아름답고 유익하고 복되게 즐기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예수님은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도록”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생명을 풍성히 누린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생명을 최고로 즐기는 것입니다. —강세대(하나님,사람에게 감동받다)중에서—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0:19)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1:2)

지혜없는 자는 그의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잠 11:12)

두루 다니며 험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것을 숨기느니라 (잠 11:13)

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으려니와 마음이 굽은 자는 멸시를 받으리라 (잠 12:8)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 (잠12:15)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 (잠 12:18)

웃을 때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잠 14:13)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행동을 삼가느니라 (잠 14:15)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16:18)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것보다 나으니라 (16:19)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18:6)

많은 친구를 얻는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18:24)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19:11)

현대인들이 인스턴트 식품이나 자동 기계를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수고하지 아니하고 손쉽게 즐길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이런 성향이 신앙 인격을 세우는 일에까지 나타나고 있지 않나 두려울 때가 많다. 인격 교육에는 인스턴트가 있을 수 없다. 특히 신앙을 키워 주고, 인격과 생활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일은 눈물과 땀으로 얼룩진 긴 시간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소원이다. 잘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교훈을 그대로 순종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우리에게 자주 나타나는 문제가 있다면 성장해야 한다는 바람이 몹시 약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열매 없이 낭비해버린다. 우리 주님을 슬프게 하는 이러한 자세는 하루 빨리 정리해야 마땅할 것이다.

—작은 예수가 되라(옥한흠)—-

만년 갓난 아기 신자.

요즘 교회 안에서는 내가 ‘만년 갓난아기 신자’라고 부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들의 교회 가운데는 수년 동안 설교를 꼬박꼬박 들었는데도 처음과 다를 바가 없는 신자들이 적지 않다. 목사는 어제나 오늘이나 여전히 그들의 하나하나를 돌봐 주어야 한다.

기저귀가 젖었는지 가끔 들춰 보아야 하고, 토닥토닥 베이비 파우더도 발라 주어야 하며, 우유가 너무 뜨겁지는 않은지 볼에 대 보아야 하고…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군병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들은 군대라기 보다는 차라리 신생아들로 가득 찬 산부인과 병원처럼 보인다. 때로는 수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우리들의 교회를 바라보며 우리는 자신을 속인다. 우리는 그것이 ‘성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수적증가가 곧 영적성장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무덤들도 역시 수적으로 증가하고 있으니까. 사랑이 없는 백 명의 성도들이 여전히 사랑이 없는 성도 2백명으로 늘어났다는 것은 뒤룩뒤룩 비곗살이 쪘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한다”(마태복음 12:34)고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가 있을때,

우리 화제의 중심도 그런 것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생각이 어떤 문제나,의복,직업,

기타 세상사에 가 있으면, 우리가 이야기하는 내용도

그런 것들에 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깊이 거하는 삶을 살고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샘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선을 이루기도 하고 

악을 이루기도 하는 우리의 말의 능력을 깨닫기 바랍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잠언 18:21)

우리의 혀를 잘 제어하면 우리의 입은 생명의 샘이 될것이며,

우리의 말은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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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사람

20세기 초, 일본에 나가오 마끼라는 젊은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갓 안수 받은 그는 어디에서 교회를 개척할 것인지 일본 지도를 펴 놓고 기도하다가,

동서남북 100킬로미터 이내에 단 한 명의 크리스쳔도 없이

온갖 미신이 판을 치고 있던 북쪽 가나자와를 찾아냈습니다.

젊은 나가오 목사님은 곧 가나자와로 이주,

그곳에 텐트를 치고 개척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창립예배는 아내와 아내의 품에 안긴 아이를 놓고 드렸습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가도 신자는 생기지 않습니다.

6개월이 지나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럴 경우 우리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믿습니다” 하고 호기롭게 시작은 하지만 한 사람의 신자도 오지 않는다면

6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이곳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구나” 하며

딴 곳으로 간단히 옮겨 가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나가오 목사님은 그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그곳으로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었기에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이루실 일이 있을 것을 또한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를 무려 5년간이나 지켰습니다.

예배 때마다 아내와 아이들만을 놓고 설교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 예배 시간에 마침내

천막교회의 장막을 젖히고 첫 번째 교인이 나타났습니다.

청년이었습니다.

그 순간 나가오 목사님의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날 밤 나가오 목사님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열정적으로 설교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뒤 나가오 목사님은 청년과 함께 자기 집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식사 도중 청년이 갑자기 ‘욱’ 하더니 입에서 핏덩이를 토해 내었습니다.

폐병 환자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폐결핵은 무서운 불치의 전염병이었습니다.

일반인이 폐병환자와 한 식탁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은

아예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나가오 목사님의 마음속에 순간적인 갈등이 일었습니다

 ‘이런 괘씸한 사람이 있나? 당장 쫓아 버릴까?’

그 순간 나가오 목사님의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주님께서 내게 처음으로 보내주신 사람인데….’

나가오 목사님은 행주를 가져와 자기 손으로 청년이 각혈한 핏덩이를 치웠습니다.

그리고 다시 상을 차린 뒤 청년과 함께 저녁 식사를 계속했습니다.

그 청년은 유명 정치인의 사생아였습니다.

출생이 어두웠기에 그의 삶은 어린 시절부터 밝을 수가 없었습니다.

청년이 된 그는 우연히 복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복음 속에서 새로운 빛과 희망을 접한 그는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신학교 재학 중 폐결핵이 발병,

완치되면 복학을 허가한다는 조건으로 강제휴학처분을 당했습니다.

다니던 교회로부터도 병이 낫기 전까지는 교회 출석을 삼가 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평소 자신과 절친하게 지내던 교우들도 모두 그를 외면하였습니다.

폐결핵의 공포에 떨던 1세기 전

신학교나 교회 그리고 교우들로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지만,

막상 주위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그의 영적 상처는 컸습니다.

그는 누구에게도 치료비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폐결핵을  타인에게 전염시킬만큼 경솔한 인간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폐병환자인 자신을 말로서나마 하나님의 자녀로

따뜻하게 맞아 주는 크리스챤을 단 한 번이라도 만나 보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곳에도 그런 크리스쳔은 없었습니다.

다시 깊은 영적 어둠에 빠진 그는, 예수도 성경도 모두 거짓말이라 단정했습니다.

예수님 가르침대로, 성경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한 그는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자실 시도 직전, 우연히 나가오 목사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가나자와의 나가오 목사는 단 한 명의 신자도 없는 교회를 포기하지 않고

5년간이나 지켜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나가오 목사님이 훌륭한 분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청년은 가나자와로 향하였습니다.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나가오 목사님을 만나보고,

만약 그분도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자신을 대해 주지 않으면

그 때 스스로 세상을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가오 목사님을 만나 함께 저녁 식사를 나누던 중,

청년이 밥상 위로 각혈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가오 목사님은 청년이 토해 낸 핏덩이를 말없이 닦아내고

다시 밥상을 차려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이후,

나가오 목사님 부부는 청년을 자기집으로 데리고 살면서

가족처럼 극진히 보살펴 주었습니다.

청년은 그와 같은 나가오 목사님을 통해 다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의 앞에 살아 계셨습니다.

주님의 은혜와 나가오 목사 부부의 보살핌으로

폐결핵에서 완치된 청년은 신학교에 복학,

후에 그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베와 도쿄에서 수없이 빈민을 위해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았습니다.

변비는 빈민의 가장 큰 고통 중의 하나입니다.

먹을 것이 없어 몇끼씩 연달아 굶을 경우

장에 남아 있던 변이 차돌처럼 굳어,

이것이 항문에 걸려 배변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요즈음에도 이런 환자는 의사가 고무장갑을 끼고

손가락으로 굳어진 변을 후벼 냅니다.

도요히코 목사님 역시 변비로 고통 받는 빈민들의 항문을

일일이 손가락으로 후벼주었지만,

그 중에는 손가락만으로는 항문을 뚫을 수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 도요히코 목사님은 더러운 빈민의 항문에 자기 입을 갖다 대고,

차돌 같이 굳어 있는 변을 침으로 녹여 빨아 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도요히코 목사님에게 어떻게 그렇게까지 할수있느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배운 대로 합니다. 제 선생님은 제가 토해 낸 폐결핵 핏덩이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분이 제게 해 주신 것에 비하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후 중국으로 건너간 도요히코 목사님은

중국의 빈민들을 위해서도 똑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장제스(장개석) 총통의 부인인 쑹메이링(송미령) 여사는 크리스쳔이었습니다.

도요히코 목사님의 이야길 듣고 크게 감동한 그녀는

도요히코 목사님을 모셔다가 개인적으로 성경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아내를 통해 도요히코 목사님을 알게된 장 총통 역시

목사님에 대해 깊은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1945년 마침내 패망한 일본군과 일본민간인이 중국에서 철수할 때의 일입니다.

당시 중국 땅에 있던 일본민간인의 수는 200만명에 달했습니다.

2차 대전 중 일본이 점령하였던 다른 여러 나라에서는

현지인들이 철수하는 일본인들에게 테러를 가하는 사건이 빈번하였습니다.

사할린에 있던 일인들은 소련군의 함포사격과 공습으로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지배자로 그 땅을 착취하던 일인들이었으니,

그들이 패주하며 현지인들에게 당한 보복은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에는 무려 200만명의 일인들이 있었음에도

철수하는 일인에 대한 테러나 보복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천황의 무조건 항복과 동시에 장제스 총통이

중국 거주 일인들을 위해 내린 포고령 덕분이었습니다.

“일본인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물자를 약탈하는 자는 극형에 처한다.”

장 총통이 일인들을 위해 이 같은 포고령을 발동한 토대가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님으로부터 받은 감동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나가오 목사님은 평생 한 명의 크리스쳔밖에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경제논리로 보면, 아니 오늘날의 목회 성장 원리로 따지자면

그 분은 실패한 목사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그분이 목회 실패자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오 목사님이 아니었던들

위대한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님은 존재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나가오 목사님을 만나지 못한 청년 도요히코 목사님은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나가오 목사님을 만나지 못한 청년 도요히코는 벌써 자살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요히코 목사님의 세계적 명성은 나가오 목사님으로 인해 가능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도요히코 목사님이 빈민들의 항문을 빨아 줄 때,

도요히코 목사님의 마음속에 나가오 목사님 역시 함께 있었습니다.

도요히코 목사님이 중국 빈민을 위해 자신의 생애를 바칠 때,

나가오 목사님도 그 현장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장제스 총통이 일인들을 위하여 포고령을 발동한 배후에 나가오 목사님도 물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우라 아야꼬 여사는 ‘기도해 보시지 않을래요?’에서,

도요히코 목사님도 위대하지만 그를 있게 한 나가오 목사님이 더 위대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나가오 목사님이야말로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분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세운 천막교회를 단지 교인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거두어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비록 오늘이 의미 없어 보일지언정 오늘은 내일을 위한 예비임을,

내일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신자도 없는 교회를 무려 5년동안이나 지켰습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자시 세계를 확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밥상에서 핏덩이를 토하는 폐병환자마저 수용할 정도의 큰 진설병을 지닐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이성적인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분이 자신의 감성을 더 소중히 여겼더라면,

5년 동안 몇 번이나 천막을 옮겼는지 자신도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이성을 토대로 한 의지적 결단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자리를 끝까지 지켜 내었습니다.

그분은 결과를 보고 싶은 유혹을 탈피한 자였습니다.

만약 그분이 자기 목회의 가시적인 결과나 업적에 집착했다면

핏덩이를 토해 내는 폐병환자에게 밥 한 끼를 대접할 수는 있었을지언정

그를 데리고 살며 가족처럼 보살펴 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가시적인 결과의 유혹에 빠진 목회자에게 사람들의 머릿수와

그들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지갑의 두께가 중요한 반면,

당시 폐병에 걸린 청년을 돌보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어리석어 보이는 일을 당연한 듯 행하였습니다.

그분이 정말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을 믿었기에,

모든 결과의 유혹으로부터 완전 자유를 누리고 있었던 덕분입니다.

나가오 목사님은 하나님을 비젼으로 삼은

진정한 비젼의 사람이었기에 참된 섬김과 봉사를 행할 수 있었고,

그분의 삶을 통하여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님을

당신의 도구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비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되었습니다.

당신의 그 비젼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나가오 목사님을 얼마나 귀히 여기셨을지는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비전의 사람—–이재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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